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내몽골 자치구 (문단 편집) == 역사 == [include(틀:몽골의 역사/근현대)] [[한나라]] 때는 아시아 최초의 유목제국이었던 [[흉노]]의 땅이었으며, [[흉노]]의 후예로 추정되는 튀르크계의 [[돌궐]] 역시 몽골, 남시베리아, 북중국, 신강에 걸친 영역을 확보했다. [[당(통일왕조)|당]] 왕조에 들어서 [[당태종|태종]]의 북방 원정으로 중국에 귀속되어 기미주가 되었었으나 돌궐 제2제국의 중흥으로 빼앗겼고, 다시 돌궐을 멸망시킨 튀르크계 [[위구르 제국]]이 차지했다. 원래 북만주에 살고 있었던 원시 몽골족인 몽올[[실위]]족이 초원으로 진출한 후, 그들 중 한 씨족인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 씨족에서 [[칭기즈 칸]]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나와 몽골·튀르크계 제부족을 통일하면서 몽골족이 생겼다. 이 몽골족은 나중에 중국 북부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금나라]]와 [[서하]]를 멸망시키고 [[몽골 제국]]을 세웠다. 한족의 [[북송]] 때는 티베트계 [[탕구트]]족의 [[서하]], 몽골계 [[거란]]족의 [[요나라]], 퉁구스계 [[여진]]족의 [[금나라]]가 공존했다. 특히 요나라는 내몽골 남부 전체를 지배했으나 서하와 금나라는 일부를 지배하는 데 그쳤다. 정확히 말하자면 요나라는 동남부의 츠펑 시 일대부터 서남부의 오르도스 동쪽까지 통치했고, 그 이후 오르도스 일대는 서하가, 내몽골의 동부 흥안성 일대(만주로도 여김)는 금나라가 가졌으며, 내몽골 고원은 칭기즈 칸의 등장 이전까진 몽골·튀르크계의 각 부족이 길항하는 내전 상태였다. 그러다 칭기즈 칸의 등장으로 [[카마그 몽골]]에 의해 각 부족이 통일되어 '몽골'이라는 문화적,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이 드디어 생겨나게 되었다. 칭기즈 칸 등장 이전의 '몽골'은 그저 수많은 부족 중 하나인 카마그 몽골의 이름에 불과했으나 칭기즈 칸은 최초로 초원의 모든 유목민에게 몽골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했고, 이것이 몽골 제국, 그리고 현대의 몽골로 이어졌다. [[몽골 제국]]은 칭기즈 칸 사후 후손들에 의해 나뉘어 지게 되었고, 그 중 하나인 [[원나라]]는 몽골과 중국을 모두 아우르는 대제국을 이루었다. 원나라 태조 [[쿠빌라이 칸]]은 [[양양 공방전]]과 [[애산 전투]]로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통일하면서 몽골의 전통을 벗어나 대원제국을 자처하면서 중국식 연호를 사용했고, 국자감 설립 및 과거제도를 시행하면서 유교적 국가체제를 확립했다. 여기에다 전통에 따라 전 왕조들의 역사서인 《[[송사]]》와 《[[금사]]》, 《[[요사]]》를 편찬하면서 중화 왕조임을 자처했다. 이후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가 등장하면서 원나라는 한족에게 밀려 중원을 빼앗기고 몽골 고원으로 물러났다. 이때의 원나라는 스스로 북원이라 칭했다. 한동안 내몽골 일대에는 북원과 여러 몽골 칸국들이 일어나 명나라와 대치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다시금 몽골 부족을 통일한 다얀 칸과 어느 정도 부흥기를 성립시킨 알탄 칸이 있다. [[파일:589px-Ming_Empire_cca_1580_(en).svg.png|width=32%]] [[파일:중국 장성.jpg|width=63%]] 이후 내몽골 지역은 차하르 부족이 계속 다스리다가, 1635년 만주족이 세운 후금에 릭단 칸의 아들 에제이가 항복하고 이후 만주와 함께 청나라 아이신기오로 황실의 지배를 받았다. 이 일로 청나라의 황제는 원나라의 옥새를 얻어 몽골제국 대칸의 권위를 이양받았고, 내몽골은 완전히 청나라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청나라는 만주족과 몽골족의 연합제국의 형태를 유지하며 고종 [[건륭제]] 때는 할하부가 중심이 된 외몽골까지 병합했다. 청나라는 18세기 건륭제 시기에 외몽골과 신강, 티베트에 걸쳐있던 [[오이라트]]계 [[준가르]] 제국을 격전 끝에 없애버리고 이 지역들까지 정복해 버렸다. [[파일:1372px-Qing_Empire_circa_1820_EN.svg.png]] 한편 몽골 팔기가 주둔한 팔기군 군영 중심으로 군량을 보급할 목적으로 [[둔전]]이 설치되었는데, 원래는 팔기군들이 직접 경작해야 했으나 팔기군들이 힘든 농사일을 꺼려 둔전 경작을 한족 농민들에게 맡기는 일이 많았고, 팔기군 둔전을 중심으로 한족 정착민 인구가 늘어나면서 결과적으로 한족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근대 내몽골 지역은 비교적 척박한 토질에 부족한 강수량 때문에 농업으로는 충분한 소출을 얻기 힘들었으나, 아메리카 대륙에서 수입된 [[고구마]], [[감자]], [[옥수수]], [[호박]] 등이 도입된 것을 계기로 내몽골 지역의 인구 부양력도 증가하게 되었다. 청나라 치세 증가한 한족 인구 중 적지 않은 수가 바로 내몽골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외몽골에서는 [[복드 칸]]이 독립을 선언했으나 내몽골은 독립에 호응하지 않고 [[중화민국]]에 잔류했다. 이에 외몽골 측이 내몽골을 복속하기 위해 침공을 감행했으나 [[원세개]]의 개입으로 패퇴했다. 북양정부는 내몽골의 왕공 제도를 인정하고 특수 행정구역을 두어 통치했다. 이후 들어선 국민당의 국민정부는 내몽골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여 1928년 러허성(熱河省)과 차하얼성(察哈爾省), 쑤이위안성(綏遠省) 등의 행정구역을 기존의 변강(소수민족 특별구)에서 성으로 승격해서 관리했다. 내몽골은 [[장제스]]의 중앙정부를 지지하면서 자치권 확대를 도모했으나, [[일본제국]]의 세력이 만•몽에서 확장되면서 장제스보다 더 많은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일본 측에 줄을 대기 시작했다. 1936년 [[데므치그돈로브]]를 옹립한 [[관동군]]이 [[수동사변]]을 일으켜 내몽골 병탄을 시도했으나 [[푸쭤이]]의 반격에 격퇴되었다. 그러나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제국군에게 내몽골은 병합당했고 괴뢰국인 [[몽강국]]이 세워졌다. 신해혁명 이후부터 2차대전 시대까지 내몽골 독립 운동 역사는 [[https://www.khan.co.kr/feature_story/article/201701062114005|해당 기사]]를 참고. 1945년 8월, 공산주의 몽골군과 소련군의 합동작전인 [[8월의 폭풍 작전]]으로 인해 소련군 플리예프 기병-기계화 집단이 고비사막을 건너 쳐들어와 이미 미국에 의해 망해가던 일본제국이 세웠던 괴뢰국 몽강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당시 군비의 대부분을 해군력에만 쏟으며 미국과의 전쟁에 정신이 팔려있던 일본은 손쉽게 무너졌다. 소련은 아예 내몽골을 외몽골에 병합시키고, 조만간 '몽골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소련에 편입시키려 했으나 미국의 반대로 철회했다. 1945년 9월에는 [[내몽골 인민 공화국]]이라는 독립국가가 세워졌지만 몇 달 못가 중국 공산당으로 흡수되었다. 이후 [[마오쩌둥]]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후 외몽골은 [[몽골 인민 공화국]]이 되어 소련에 의해 독립되었고, 내몽골은 1947년 5월 1일 [[중국 공산당]]의 행정개혁으로 내몽골 자치구가 설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